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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머리 농활대여, 영원하라

눈빛포스 2012. 4. 5. 15:52

 

 

 

거머리 농활대여, 영원하라

손희정 33세. 특수교사. 경기도 이천시 송정동

 

갓 대학에 입학한 1999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보리라, 의욕에 가득 찼던 나는 망설임 없이 경남 창녕군 대합면 모지마을로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떠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같은 마을로 배정된 사범대의 다른 과 사람들과 모여 우리 농활대의 이름을 ‘거머리 농활대’라 지었다. “거머리 농활대여~”로 끝나는 주제가도 만들어 부르며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기고, 처음 경험하게 될 세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웬걸! 도착해 보니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농촌의 쌓여 있는 일이란 만만치 않았고, 평소 힘에 부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농활대에 의뢰하는 어르신들의 요청이 쇄도하여 여름 땡볕 아래 오전, 오후 작업을 마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곤 하였다. 농사일에 대한 경험이라곤 전무했던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들은, 열심히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다행히도 어르신들은 그런 모습도 귀엽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다.

 

좁은 마을 회관에서 3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필통에 꽉 찬 연필들처럼 잠을 자며 설익은 밥을 해먹고,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해 정체 모를 냄새를 풍기며 생활하였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 노고 속에 생산되는지,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또 농작물 가격 하락 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푸짐한 새참을 차려주시는 시골 인심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기억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자연 친화적 화장실과 밖에 줄서서 기다리는 이들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큰일을 보는 횟수를 최소화하고자 수분 외에는 섭취하지 않다가 4일째쯤 생애 첫 기절을 했던 일, 결명자 잎들을 하나씩 “숨가라(심어라)”는 할머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열심히 결명자 잎을 흙에 완전 파묻어 숨겨버렸던 일, A대원이 렌즈를 빼서 소주잔에 고이 담가 두었는데 B대원이 청소를 하다 문밖 멀리 내용물을 뿌려 버렸던 일 등등.

 

어느새 마지막 날을 앞두고 우리는 어르신들과의 마을 잔치를 준비했다.

 

우리는 춘향전을 준비했다. 양파 망으로 얼굴 가린 이몽룡과 터프하고 부산한 성춘향, 뜬금없는 뱀 장사까지 등장하는 엉뚱신기 춘향전을 보면서도 함께 웃고 울어주시던 마을 분들. 짧고도 길었던 농활의 추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농활 첫날 ‘이렇게 힘드니 농촌으로 처녀들이 시집을 오지 않나 보다’ 생각했던 내가, 7년 후 그 옆의 시골 마을로 시집을 갔던 것이었으니~ 소개팅으로 만나 운명처럼 결혼한 남편이, 바로 그 옆 마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모지마을을 스쳐 지나며 뜨겁게 벅차오르던 1999년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던 그 시절의 젊음’을 되새기다 보면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거머리 농활대여~’라던 외침은 아마도 영원히 내 마음을 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