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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현주 목사

인연 - 관옥 이현주 목사

눈빛포스 2009. 3. 28. 15:58





  
인연 - 관옥 이현주 목사

1979년 친구로부터 이현주 목사 이야기를 들었다. 죽변 바닷가에서 군복무를 하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뭔가 다른 구석이 있는 존경할 만한 목사라는 것이다. 그 친구가 군생활을 그곳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현주목사를 몰랐을 것이고 내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가리방에 꼼꼼이 글을 쓴 주보가 매주 바다향기를 싣고 날아왔다. 주보를 읽는 것이 기쁨이었다. 나중에 주보에 나온 글들을 모아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처럼'이란 책으로 묶기도 하였다. 참 글을 잘 쓴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그가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였으며, 문익환목사와 함께  성서공동번역 문장위원으로 참여하였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81년 봄 이현주목사를 찾아 멀고먼 울진의 죽변항을 찾아갔다. 이때 사귀던 아내와 함께 갔다. 죽변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였다. 목사님 방에 들어 서니 책을 번역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잠시 책상을 물리고 함께 차를 나누었다. 방안 사면이 천장 꼭대기까지 책들로 차있었다. 도서관말고 그렇게 책이 많은 집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이목사님도 말씀을 하셨지만 이사를 하게 되면 트럭 세대가 움직여야 했는데 짐의 대부분이 책이었다고 한다.

1981년 나는 가출을 하였다. 그리고는 황산이라는 시골 흙집에서 살았다. 세상을 거부하고 싶었던 맹목적이고 철없는 반항이었다. 그때 마침 이목사도 충북 음성의 조촌감리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옮긴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 유명한 모과주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 1982년 정초 교회를 떠난 뒤 다시는 교회 담임 목사를 맡아 보지 아니하였으며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조촌리 감리교회에 내가 찾아간 것은 아래의 편지글을 받고 나서이다. 쓸쓸한 교회와 참담함 심정의 사모님이 기억에 난다. 이목사는 그후 거의 매년 이사를 하였다. 여기 계신가 하면 벌써 저기에 계셨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며 사시는 듯했다. 그 이후로 자주 그분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오늘은 1982년 초에 받았던 이현주목사의 편지글을 옮겨 본다.  
허락을 받지 않고 올려서 미안하지만 아마도 이런 글은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관옥선생도 이런 편지가 남아 있었나 하실 듯 하다.


『희망의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희망을 품을 건덕지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러니까 더욱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하겠지요. 당신의 가슴에 품은 모든 꿈과 계획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새해 출발점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참으로 송구스런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무엇보다 부족하기 짝 없는 저희들을 격려해 주시고 큰 기대로서 보살펴 주신 분들을 생각할 때, 지금 이 글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은 찟어질 것만 같습니다.

이현주 목사는 조촌에 온지 두 달만에 이 곳을 떠납니다. 이곳 형제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어, 또다시 정처없이 떠날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목사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이곳 신도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면, 선물로 받은 모과 다섯 개로 모과주를 담근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성탄절 준비를 위해 주택에 들어 온 집사님들이 모과주 담아 놓은 병과 빈 소주병을 다락에서 발견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어떤 여집사님은 어떻게 목사님 방에 술병이 있게 되었느냐면서 가슴을 치고 울었습니다.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받은 충격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너무나도 이곳 형제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목사는 그들 앞에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냐는 것이었어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해조차 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안겨 준 상처는 무슨 말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물며 무슨 해명의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책임을지고 떠나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떠나면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2월 31일 밤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안타깝고 지루하기만 한 1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글에서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로 해서 하루라도 이곳에서 빨리 떠나는 게 교회를 위해서나 우리를 위해서 좋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어떤 경위로 해서인지 모르나 목사의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수상한 자의 거동을 살피듯이 살피는 눈들이 있는 이 不信의 마을에서 더 이상 버틸 용기를 우리는 잃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우리는 두 달만에 참담한 패배자가 되어 어디인지도 모를 또 다른 광야로 쫓겨 갑니다. 성문 밖에서 동족의 불신을 산 모세가 찾아갔던 미디안의 광야가, 우리를 위해서도 어딘가 마련되어 있겠지요.

이번 일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도 교만했던 자신들을 뉘우치게 되었고, 우리에게는 아직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쏟아 부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던 시골이 함부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성역임을 알았고, 종교가 얼마나 인간을 화석화시키는지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앞으로 저희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인간을 화석으로 만드는 종교와 투쟁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급한 것은 이달(1월) 안으로 교회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 떠난 자리에 한시라도 더 머물러 있는 것은 다만 괴로움일 뿐이지요. 혹시 근처에 빈 방이나 셋집이 있는걸 아시거든 속히 연락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는 지금 무일푼입니다. 동전 한 푼 없습니다. 그러나 사글세 3∼5만원 정도라면 어떻게 꾸려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세라도 100만원 정도라면 융통해 볼 수 있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농촌 교회로 간답시고 떠들어 대어 이곳 저곳에서 격려금과 위로의 편지를 수북이 받아 놓고 이렇게 떠나게 되니 도무지 어디에 머리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허탈할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마 저희의 사정을 알려 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절이라 생각되어 이 편지를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1982년 1월 2일  이현주 정용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