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live one life
[이현주 목사 글모음] ‘이랴’와 ‘워’ 본문
이현주 목사 글모음
1. 사람답게 산다는 일
인간은 자연의 일부(一部)이면서 자연이다. 자연이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지 못하니 그 삶이 어찌 고단하고 힘겹지 않으랴? 자연은 억지를 모른다. 모두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이루어지니 따로 힘쓸 데가 없다. 억지로 흐르는 물 못 보았고 기를 쓰고 피는 꽃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을 스승으로 보셨던 노자는 말하기를, 나의 가르침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하기 쉽다고 했다. 빈 말이 아니다. 대나무가 너구리처럼 살려면 힘들겠지만 대나무가 대나무로 사는데 무슨 힘이 들겠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는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 비교가 모든 비극의 원인
비교가 모든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였던가? 나를 남에게 견주어 봄으로써 득될 것 하나 없다. 오히려 고약한 결과만 따라온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이렇게 판단되면 우월감이 생긴다. 교만해진다. "내가 너보다 못하다." 이렇게 판단되면 열등감이 생긴다. 비굴해진다. '내가 너와 동등하다." 이렇게 판단되면 조급증이 생긴다. 불안해진다. 나를 남에게 견주어 본 결과로 생기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정말 고약하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일에 아무 도움이 못 될 뿐더러 해독만 끼친다.
「淮南子」회남자에 이르기를, "활 잘 쏘는 자는 비단 짜는 자와 다투지 않는다."(射子不與羅子競多)고 했거니와, 그러니까 활 쏘는 자끼리는 다툴 수 있다는 얘기가 암시된 셈인데, 거기서 조차 벗어나면 드디어 자유만세, 해탈이다.
아무개는 세상이 말하는 이른바 '글쟁이'다. 글쟁이니까 글을 쓰는 것으로 만족이다. 아무개는 어째서 다른 아무개처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나 문학상을 골고루 타거나 시대의 저명인사가 되어야 하는가? 그럴 까닭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이 꾸짖기를,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는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아무렇게 꾸짖어도 좋다. 잣대를 지니지 않는 사람한테는 장단(長短)이 없고, 저울이 없는 사람한테는 경중(輕重) 또한 없는 법. 감추어 놓은 물건이 없는데 누가 그한테서 도둑질을 할 수 있으며, 유능한 인사 될 마음이 도무지 없거늘 누가 그의 무능을 탓할 수 있으랴?
채송화는 해바라기의 크기를 부러워하여 그 앞에서 주눅들지 않으며, 메추라기는 공작의 화려한 날개를 시세우지 않는다. 이는 저들에게 자기를 남한테 견주어 보는 '진보된 눈'(文明)이 없기 때문일 터이다.
우주의 '중심'에 서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중심이 곧 나의 중심이다. 중심으로 갈수록 '남'이 사라지다가 드디어 최후로 남는 것은 천상천하에 홀로 존귀한 '나'뿐이다.
'남'이 없는데 세상천지 누구와 다툴 것인가.
3. 사람하고 놀고 싶다.
사람하고 놀고 싶다.
미움과 분노로 물결치는 군중 말고
천지를 무너뜨릴 만한 함성 말고
펄럭이는 깃발
저 거대한 혁명 말고
타도 타도 타도의 물결 말고
투사 말고
전사 말고
열사도 말고
통일까지도 말고,
사람하고 놀고 싶다.
연구도 말고
사업도 말고
창조도 말고
파괴도 말고
운동도 말고
일 일 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 말고,
그냥 놀고 싶다.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염통이 터질 것 같다.
4.배움(學)과 물음(問)
배움(學)과 물음(問)이 이음씨 없이 맺어진 것이 학문이다. 문학이라 하지 않고 학문이라 함은 물어서 배우는 게 아니라 배워서 묻는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 학문이란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제자가 물어야 할 바를 제대로 묻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는 자는 결코 그 틀을 찢고 나올 수 없다.
이른바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어떤 틀에다가 우겨넣는 범죄행위는 결코 교육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끝없이 ‘자유’를 바라고 나아가는 자세에서 비로소 사람이 사람인 까닭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자연은 일란쌍생아다. 한쪽이 깨어지면 한쪽이 죽는다. 사람을 살리는 교육을 창조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 잡는 교육 아닌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
가을 하늘은 저리도 높푸른데 이 땅의 아이들만 터무니없이 풀죽어 무거운 책가방 아래 짓눌려 있을 까닭이 없잖은가 말이다.
<아무일 안하고 잘산다>에서
5.아무 일 없음
이현주 목사는 이랬다
제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찌 기분이 좋던지 뭔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 내내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드는 기도시간에 그랬습니다. 주님 왜 아무일도 없었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래...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은 바람이 없으면 울지 않는 법인데 바람을 어디서 꾸어 와서 울게 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6. 길을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 내는 것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은 어떤 뜻일까?
가난하다는 말은 지닌 것 즉, 소유(所有)가 없다는 말이다. 소유가 없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요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두려움이 없으니까 성낼 필요가 없고 그러니 결국 행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거기에 마음까지 가난하면 행복은 완벽해 진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욕심이 없으니 무엇을 갖지 못한 데서 오는 불만이나 초조함이 있을 리 없고, 그것이 바로 가난한 자의 행복인 것이다.
자가용 자동차 없으면 교통사고를 내어서 누구를 다치게 할 염려가 없고, 남에게 빌려 준 돈 없으면 떼어 먹힐 걱정없고, 사업체 없으면 부도낼 염려없고, 동업자가 없으면 배신당할 걱정이 없고, 계획이 없으면 실패할 근거가 없고, 기댈 버리면 실망 또한 없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자유'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길을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 내는 것(爲道日損)."이라고 말한 노자가 과연 옳았다.
시방 나는 그 누구와도 어떤 일로도 경쟁할 마음이 없다. 생각하건데 여기까지 이른 것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은총인지!! 아직도 두텁게 쌓인 습기(習氣) 탓에 순간순간 남과 비교를 하는 버릇을 깨끗이 청산하지는 못했지만, 그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온몸을 긴장시켰던 근육이 풀리며 나는 혼잣말로 줄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본다. "뛰고 싶은 사람은 뛰어라. 나는 천천히 걷겠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中
7.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글을 쓰든 강연을 하든 무엇을 하든 나는 그것을 '잘'하려는 마음이 없다. '잘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야 아직 벗지 못한 허물이겠지만, 마찬가지로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 화살보다 빠르게 자신을 변호하는 버릇도 아직 버리지 못했지만, 남들의 잘한다 못한다 소리에 웃고 우는 것이 얼마나 못난 짓인지 이제 웬만큼 알고 있다. 아아, 얼마나 오랜 세월 나는 그 '잘한다'는 말 한마디 들으려고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려왔던가? 어떤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잘한다' 또는 '좋다'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그가 그 순간 기분이 좋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방금 아들을 잃은 어머니한테는 어떤 소식도 희소식일 수 없다. 세상이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인간의 감정의 상태가 좋거나 나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변덕스러운 사람의 감정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남한테 인정받겠다는 마음조차도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8. 지금 상태로 만족이다.
나는 시방 하느님께 나를 위해서 무엇을 더 달라고 기도할 게 없다. 지금 상태로 만족이다. 사람들이 부르면 가고 글을 쓰라면 쓰고 짬이 생기면 책도 읽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한때는 육체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기도 했고 나 또한 그들처럼 육체 노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기서도 벗어났다. 글을 쓰고, 다니면서 이야기하는 이것 또한 육체 노동이 아닌가? 사람의 노동을 육체 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갈라 놓는 것 자체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관념의 우롱(愚弄)임을 깨달았다. 정신과 육체(물질)는 그렇게 따로 나눌 수 있는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현주는 이현주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니, 그분이 지어주신 '이현주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지만 않는다면, 윤동주 시인만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나 역시 아무런 부족이 없다.
나 자신뿐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마음을 비웠다.
나는 나의 길을 담담히 걸으면 된다.
나는 시방 어느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나는 내 안의 나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내 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마음뿐이다. - 新川
9. 내 마음 밝으면 네 얼굴 밝고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잠언 27:19
얼굴은 마음의 창
내 마음 밝으면 네 얼굴 밝고
네 얼굴 밝으면 내 마음 밝고
내 마음 어두우면 네 마음 어둡고
내 얼굴 어두우면 네 마음 어둡고
원하든 아니하든 우리는 마주 서 있는 두 얼굴!
10.물은 억지로 흐르지 않는다
사람은 한평생 배우면서 살아간다. 자기가 배우고 있는 줄 알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배우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기도 한다. 예컨대, 시집살이를 어렵게 한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어렵게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자기는 나중에 지금 시어머니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란 머리보다 몸으로 살게 되어 있고 배우는 일도 머리보다 몸이 빠른지라 막상 시어머니가 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배우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일진대,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우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고 했다.
왕필(王弼)은 이 말을 풀이하면서, 도가 자연을 본받기 때문에 하늘이 도를 본받고 하늘이 도를 본받기 때문에 땅이 하늘을 본받고 땅이 하늘을 본받기 때문에 사람이 땅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훌륭한 학생이기 때문에 남의 스승이 된다는 얘기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없어서 억지로 자연(自然·절로 그러함)이라 부르는 ‘그것’ 한테는 스승이 없다. 더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동시대에 참 스승으로 모실 분을 만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복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 인연이 닿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학생이 준비되어 있으면 선생이 나타난다는 속담을 믿고 평소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두루 갖추고자 애쓸 필요는 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사람이 최고의 스승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그 자연이 바로 최고, 최후의 스승임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얘기다.
사람이 사람한테서 배우면 주로 말이나 글을 쓰기 때문에 쉽기는 하나 위험하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란 본디 태생이 모자라고 어긋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말없는 가르침을 베푼다고 했다.
그분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지못해서 하셨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예수가 생전에 글을 단 한 줄도 적어서 남기지 않으신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한테는 남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무심(無心)으로 남을 가르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한테서 배우면 잘못 배울 염려가 없다. 자연은 우선 사람을 가르치겠다는 뜻이 없다. 오로지 제 성(性)을 좇아 존재할 따름이고 그래서 가장 높은 스승이 될 수 있다.
높은 산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본다. 개울이 커서 강이 되고 강은 마침내 바다가 된다. 개울 강 바다가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요,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다. 강이 개울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제가 저한테로 들어가는 것이다.
11.상쾌한 밥상
지난 여름 저의 주변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복관이라는 농부가 한 달 동안 단식을 하신 것입니다. 이 분은 연세가 일흔이신데 단식을 하는 동안 매일 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밭에서 채소를 가꾸거나 길가의 무성한 풀을 베어 두엄을 만드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한 주간만 하시겠다더니 할수록 기분이 좋고 기운이 난다면서 한 주간에서 다시 한 주간으로 자꾸만 기간을 늘여 마침내 한 달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더 하시겠다는 것을 주변에서 말리고 하여 그만두셨지요. 그분이 노동단식을 통해 얼굴이 눈에 띄게 맑아지고 마음이 밝아지고 관절과 대퇴부를 괴롭히던 통증까지 말끔 가시는 것을 주변에서 말리고 하여 그만두셨지요, 그 분이 노동단식을 통해 얼굴이 눈에 띄게 맑아지고 마음이 밝아지고 관절과 대퇴부를 괴롭히던 통증까지 말끔 가시는 것을 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저는 성품이 어떤 쪽이냐 하면, 뭐든지 좋다 싶으면 당장에 그대로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계산을 않게 되고 그래서 낭패를 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래도 이 성질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철이 좀 났는지 요즘에는 주변 눈치도 꽤 보게 됩니다만.
아무튼지간에 저는 김복관 농부의 단식을 자초지종으로 지켜보고 나서 불쑥, "저도 하겠습니다"하고 말해버렸습니다. 여러 사람 있는 데서 그 말을 했으니 꼼짝없이 자기 말에 묶여서 그 다음 주간에 단식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저는 겨우 일 주일을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흙과 더불어 노동을 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놈에 아파트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어요. 물론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책이나 몇줄 읽으면서 단식을 하자니 김농부처럼 그렇게 신나는 단식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분명히 깨달았지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한틀에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전혀 다른 것임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저의 한 주간 단식은, 결과를 두고 볼 때, 저에게 과분한 열매를 맺게 해주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음식 먹는 방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새로운 깨달음(생각이 아니라 몸의 실천으로!)을 얻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밥 먹는 모양이 그 인간의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음식먹기'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지면)은 없고(짧고) 할 말은 많아서 얘기가 겅중 겅중 뛸 수 밖에 없습니다만, 지난 여름 단식 뒤에 저는 자신의 인생과 사고방식 그리고 내일을 향한 자세까지 저도 모르게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음식 먹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게걸스럽게 먹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늘 조금 모자라게 먹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쉬울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각오를 하고 나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환경과 식생활의 틀을 바꾸는 게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여행을 할 경우가 아니면 하루에 두 끼만 먹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내에게 부탁도 하고 공갈도 치고 호소도 하여 밥상에 반찬이 간장, 된장 포함하여 세 가지 이상 오르지 않게 합니다. 그것도 밑반찬 말고는 몽땅 한 자리에서 먹어 치울 수 있을 만큼만 만들라고 하지요, 그래서 한 몇달 지난 오늘에 이르러 우리집 밥상은 언제나 상쾌합니다. 도무지 찌꺼기가 없으니까요!
쌀 한 톨에 하나님도 들어 있고 조상님도 들어 있고 우주 삼라만상이 들어있는데 밥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다니! 그러고도 그 집안이나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밥먹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 못되고 건방지고 터무니없는 버릇을 없애 준 지난 여름의 단식은, 그래서 제 일생의 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지요.
12. 나눔엔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없다.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주고받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눔'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눈다'는 말에는 조금 위험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나누는 일에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서로 마주 보게 되고, 그때 자칫 받는 쪽은 고개를 숙이고 주는 쪽은 고개를 세우는 서글픈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진짜 나눔에는 '나눈다'는 말은 물론 그런 의식(意識)도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숨을 쉬면서 나무하고 산소 또는 탄소를 주고 받습니다만, 그러고 있다는(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따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무와 진짜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고 나서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게 곧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어떻게 마주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른바 '나누는 일'에 동참한다는 우리 자의식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알아두는 일이 '나누는 일' 못지 않게, 어쩌면 더욱 중요하겠다고 여겨져서입니다.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엇을 나눈다는 일은, 그러지 않고 챙기는 일에 견주어, 백배 천배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도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나눠준 적이 있겠지요. 또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일'이 한두 가지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저는 약간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이 당신의 것(?)을 저에게 나눠주신 이야기로 대신할까 합니다. 사실은 그 이야기도 묻어두고 싶지만, 벌써 다른 데서 제가 밝힌 바도 있고 해서 여기 이렇게 옮겨봅니다. 그분은 저보다 몇 살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 혼자 사는 분이고 시골에서 작은 약방을 운영합니다.
그분이 어느 날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 계신 곳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좀 한번 만나자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얼마 뒤, 마침 기회가 생겼기에 초면인 그분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당시로서는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을 내어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목사 글을 읽고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이 돈은 당신을 생각하면서 일 년 가까이 모은 것이다.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그분의 검소하다 못해 궁색함이 느껴질 정도인 단칸방에 앉아, 낡은 전기곤로 위에서 끓고 있는 밥솥을 보며, 짝도 맞지 않는 컵으로 냉수를 마시며, 두툼한 현금 봉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께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이 돈은 김 아무 집사가 이 아무 목사에게 주는 돈이 아니다. 이 점을 서로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이 돈은 김 아무 집사 속에 계신 하느님이 이 아무 목사 속에 계신 하느님께 건네주는 돈이다. 따라서 이 일에 당신과 나는 아무 한 일이 없다."
그분도 제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랬던 일이 기억나는군요.
불경(佛經) 어딘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히야여, 보는 일에는 보는 자도 보이는 것도 없어야 한다. 오직 '봄'이 있을 따름이다."
저는 이 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붙여봅니다.
"바히야여, 나누는 일에는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없어야 한다. 오직 '나눔'이 있을 따름이다."
13.지혜는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
「금강경」주해를 읽다가 천선사(川禪師)의 智不責愚(지불책우)라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어째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을까요.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이 누구한테 꾸중을 듣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소용없는 짓을 왜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안해도 될 일은 하지 않고 해 봤자 소용없는 짓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용은 없어도 꼭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어리석음은 꾸짖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도 꾸짖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도 꾸짖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짜 지혜입니다. 지혜가 필요한 사람은 지혜를 도탑게 주시는 하느님께 구하라고 했는데, 저는 진심으로 그런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길벗님, 길벗님은 요즈막에 몇 번이나 넘어 지셨습니까? 웬만큼 마음 공부가 된 줄 알았다가 그게 와르르 무너지는 참변을 몇 차례 겪으셨는지요? 저도 공든 탑이 한꺼번에 허물어 지는 듯한 난리를 예외없이 치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 난감하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기고 하지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이미 물은 엎지러 졌고 쪽박은 깨어졌는데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진짜 공부는 여기서부터 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타이르고 부추겨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것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하게, 우리는 수행정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홈런왕 행크아론이 자기가 친 홈런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스트라익 아웃을 먹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실패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치가 어찌 야구선수한테만 적용되겠습니까?
14.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나 그 현재도 역시 모른다. 어디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달리 부르면 자유(自由)!
어떤 사람이 참으로 순간을 살되 그 순간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그를 가리켜 '영생하는 이'리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물의 과거 모습을 그 위에 겹쳐 놓고 보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고약했던 사람은 그가 아무리 개과천선에 환골탈퇴를 했어도 여전히 고약하게 보인다.
어떤 일을 미래에 연결 짓지 않고 한다는 것이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거의 불가능하다. 공부를 해서 남을 주든 주지 않든, 아무튼 공부를 하면서 내알을 생각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일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어사 일을 마치고 곧 착수해야 할 다른 '일'이 늘 저만큼 대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심전력을 쏟을 수 없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 지금 하고 잇는 일을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아,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인 줄 깨닫는 순간 '잘못'은 사라지고 말았는데,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언제까지나 무거운 발걸음을 끌다니!
15. 좌절은 아름답다.
언젠가 충주에 있는 임경업 장군 충렬사 뜰에서 저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기억 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참 좋은 땅에 살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 무렵 저는 고향인 충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왜 여기가 좋은 땅이냐고 여쭙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곳이 큰 뜻을 품고 출세했다가 좌절한 장부들의 땅 아닌가?"
그리고 이어서 난세에 간신 모리배의 쇠도리깨를 맞아 숨진 임경업,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신립,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다 역시 사형에 처해진 김삼룡의 예를 들어 주셨지요.
좌절한 장부의 땅이라서 좋은 땅이라고, 그들의 좌절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고, 그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좌절은 수치요 따라서 좌절한 이들의 땅은 쫗지 못한 땅이라는 일반 상식에 정반대되는 말씀인지라, 저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루어진 꿈보다 꺾여진 꿈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실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저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그 바탕에서부터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 녹색평론을 읽다가 만난 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승 이현주 목사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추모하며 쓴 글입니다.
꺾여진 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그 분은 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제 스승이 되십니다.
사람은 한번쯤 꺾여 봐야
인생의 참길(道)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려서 이리저리 꺾이며 좌절을 맛보는 일은
삶을 더욱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좌절을 모르고 커 가는 요즘 아이들이
어째 좀 참길(道)에서 벗어 나는 것 같습니다.
16. 별을 향하여
오늘은 아름다운 시(詩) 한 편을 함께 읽기로 하겠습니다. 세월이 수상할수로 인정(人情)이 메말라 갈수록 우리는 더욱 젖은 목소릴 노래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하여 올리브산을 오르시면서 제자달과 더불어 노래를 부르셨습니다(마 26 : 30)
그는 걷고 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천 상병(千祥炳) 시인의 ‘주일(主日)2’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그”는 시인 자신이라 해도 좋습니다. 또는 이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길을 걷고 있어야 합니다. 골목, 거리, 옆길, 큰길을 걷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 옆에는 상점과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만 그것들과 상관 않고 걸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행인의 눈길을 유혹하지만 그따위 것들에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숲으로, 바다로, 마침내 별을 향하여 쉬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지금도 양 옆에 상점들과 건물들이 즐비한 인간세상의 번잡한 곳 입니다만, 그러나 그의 눈이 바라보는 것은 숲이요, 바다요, 별입니다. 자유와 진실 아름다움을 향하여 그는 지금 억압과 거짓과 추함이 가득 찬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17. 번데기 하느님
잘난 사람들 너무 많아서 탈인 요즘 세상에, 넌지시 이런 얘기는 어떨는지?
하루는 이빨이 가만 생각하기를, 나는 어째서 이빨로 생겨나 남 좋은 일만 하는가?
맛있는 음식이 들어와도 열심히 씹어 놓으면 저놈의 목구멍으로 한톨 남김없이 넘어가고 마니 이런 원통할 데가 어디 있으랴. 일을 하면 삯을 받아 마땅한데 삯은커녕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내 신세여, 하느님은 어째서 이토록 불공평하시단 말인가? 억울하고 분하다.
이빨이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라 하릴없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자니 시커먼 목구멍을 통하여 누가 소리를 재지른다. “시시한 잡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놈이 누구냐? 너는 그래도 일거리 없을 때 쉬기라도 하지 않느냐?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계속 작업 중이다. 너는 또 가끔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지 않느냐? 나는 바깥 세상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른다. 네가 감히 공자 앞에서 문자 쓸 참이냐?
“스스로 공자라는 넌 누구냐?”
“염통이다.”
"염통이 누구냐?"
“네 하느님이다!”
하느님이란 말에 질려 이빨은 그만 할 말이 없는데 이번에는 염통 저 아래 쪽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 온다.
“시끄럽다. 억울하기를 말하면 나만큼 억울한 놈이 다시 있겠느냐? 너희는 그래도 향기로운 음식을 씹기도 하고 깨끗한 피를 마시기도 하지 않느냐? 나는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더러운 쓰레기 처리만 하는 중이다. 너희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참이냐? 고얀 것들!”
“스스로 번데기라는 너는 누구냐?”
“똥구멍이다”
“똥구멍이 무엇이냐?”
“네놈들 하느님이다!”
이빨과 염통은 똥구멍 앞에서 그만 할 말이 없구나.
그렇다. 일하다가 쉴 수 있는 이빨은 쉴 수 없는 염통 앞에서 할 말이 없고 깨끗한 피를 맛볼 수 있는 염통은 똥만치는 똥구멍 앞에서 다시 할 말이 없는 법.
그러니 말 말아라, 오늘 이 땅에서 가장 많이 억울하고 가장 많이 빼앗기고 가장 많이 더럽고 가장 많이 못난 놈이 바로 우리 모두의 하느님일진데 조금이라도 제 것 가진 놈, 이름 석자 날리는 놈, 특히 자칭 타칭 지도자라는 놈은 당장 무릎 꿇고 우선 입부터 닥쳐라
저 산골 또는 들판이나 바다, 공장지대에서 이름없이 맡은 일을 하고 있는 이 땅의 민초들이 곧 우리 하느님이거늘, 세상이 하느님을 이 지경으로 멸시하다가는 아무래도 나라 망하는 꼴을 보겠구나, 보고야 말겠구나.
오래 전 신문 한쪽 구석에 나온 이현주 목사의 글이다.
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우리 식탁에 올릴 채소들을 정성껏 준비하여 손님을 맡는다.
가격이래야 오백원 천원이다.
그러나 이분들의 정성된 준비가 우리를 살리고 있다.
정보산업이 밥 먹여 준다고 법석이지만
어찌 밥 먹지 않고 살 수 있으랴.
이 땅의 농촌도 이미 노인들 천국이 되었다 한다.
그분들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요, 한울님이요, 상제인 것을...
17. 초라한 모습
초라한 모습이라! 그렇다.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초라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뿐만 아니다. 돌이켜 보면 한평생이 그대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가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얼굴이 훤칠한 미남형으로 생기지 못해서만 도 아니었다.
요컨대 어렸을 적 내 모습은
어디 한 구석 장래를 기대할 만한 싹이 보이지 않는 그런 평범한 시골 아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별로 달라진 바 없이 오늘 여기까지 이어져 왔구나.
초라한 내 인생.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고맙고 대견하다.
내 소망은 더욱 초라해지는 것이다.
빛나는 것은 싫다. 내 이름이 큰 소리로 불려지는 것도 싫다.
아직도 지난 날 철부지 시절 쌓아둔 업(業)이 커서 발걸음이 무겁긴 하지만
날마다 덜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바람처럼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이현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 초라한 모습이라.
인생살이를 초라하고 화려함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시골에서 평범하게 땅을 일구고 사는 이는 초라하고,
도회지에서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고 살면 화려할까.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인류의 비극이 싹트는 출발점이 아닐까.
아무리 겉모양이 화려해도 내면이 텅 비어 공허하다면
그 화려함은 진정한 초라함이 아닐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함은 결국 쓸데없는 것임을 알아
겉은 초라해 보여도 내면이 여유롭고 풍성하다면 그게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어느 선사가 말했다.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으니 다만 이것저것 가림을 버리는 데 있다고.
잘남도 못남도 버리고,
화려함도 초라함도 뛰어 넘어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또한 爲道日損이라.
이 말씀은 길을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
버리면 버리는 만큼 자유로 다가선다는 말씀이다.
18.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세상에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고,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역시 희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절망이나 희망은
어떤 상황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입니다> 중에서-
19. 꿈 같은 소리?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배움이 없으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율곡 선생께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쯤 되는 책의 첫머리에 쓰신 글이다. 배운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사람됨이란 무엇일까? 이런 말이 성립되려면 먼저 사람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 점에 대한 일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사람답게 산다! 내 생각에 그것은 이웃과 화목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그리하여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을 아울러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머리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것도 편의상 좋다,나쁘다는 말을 쓴 것일 뿐, 따지고 보면 좋은 머리와 나쁜 머리가 어디 따로 있는가?)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주고 남는 부분을 덜어 주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게, 그게 사람다운 삶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자연의 세계를 적자생존과 경쟁의 관계로만 보는 시각이 문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경쟁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얻어내는 오묘한 조화 또한 자연세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나 장엄함 그리고 그 조화로운 삶의 양식을 보는 대신, 다만 인간이 응용할 수 있는 자연의 힘(에너지)만 보아온 근대 서구세계가 ‘교육’까지 말하자면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적자생존과 경쟁원리에 의지함으로써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모든 것에 도전하고 싸우고 승리코자 하는 싸움꾼으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이기는 자는 이겨서 좋을는지 모르나 그가 좋아할 때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다름아닌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될 수 있으면 망각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교육 아닌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심하게 말하면 무슨 ‘괴물’로 만들자는 게 아닌지 싶다.
왜 머리가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아무래도 이 좋다, 나쁘다는 말이 걸리는데 당분간 대체할 말이 없어서 그냥 쓴다. 나는 결코 ‘나쁜 머리’라는 건 없다고 믿는다)에게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치르게 하고(그것도 보여 주거나 보는 식의, 말하자면 우애로운 ‘협력작업’을 모조리 차단한 상태에서) 그 결과로 나타난 점수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가? 세상에 이토록 지독한 불공평이 어디 있단 말인가?
‘능력’이란 본디부터 천차만별이다. 어째서 ‘능력’(힘)이 있는 놈만 기를 펴고 살란 말인가? 넘치는 아이는 덜어주고 모자라는 아이는 채워주고, 그렇게 해서 아무쪼록 서로 돕는 도움받으며 살아가게끔 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또, 저 사람 꿈꾸네 - 하고 코웃음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담하거니와, 경쟁을 원리로 한 세계는 바야흐로 무너지고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오늘 꿈꾸는 자가 내일의 새 역사에 주인공이 되게 마련이다. 코페르니쿠스도 당시 사람들한테는 ‘꿈 같은 소리’를 하는 자였다. 머지 않아, 점수 매기지 않는 교육이 출현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인류가 살아남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20. 두루말이 휴지
내가 어렸을 적만해도, 그러니까 지금부터 4,50년 전만 해도, 종이로 무엇을 닦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루말이 휴지가 말 그대로 휴지처럼 아무데나 함부로(!) 쓰이고 있다.
휴지한장을 우습게 보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나는 늘 미안하고 민망스럽다. 잠깐 생각해봐도 두루말이 휴지 한통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물자(物姿)와 인력(人力)이 동원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단언하거니와 인간이 요즘처럼 휴지를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쓰다가는 반드시 크게 낭패 볼일이 생길것이다
"옳은 말씀! 사람들이 나를 휴지로만 보니까 그게 탈일세"
"그럼 네가 휴지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나무요 흙이요 물이요 공기요 태양이요..........나는 모든것이다.
"..........?"
"만일 나무, 흙,물, 공기,태양 ....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이다."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그러니, 인간이 휴지를 함부로 쓰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함부로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을 닦을 때 쓰이려는 것만이 아닐세."
".....?"
세상에는 한 물건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려고 내가 여기 이렇게 있네만 아무도 나를 눈여겨 보지 않더구먼." ".........."
"휴지를 그토록 자주 쓰면서 한번도 휴지를 눈여겨 보지 않다니! 인간은 과연 놀라운 물건일세. 겁나는 물건이야!"
21. 물은 억지로 흐르지 않는다.
사람은 한평생 배우면서 살아간다. 자기가 배우고 있는 줄 알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배우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기도 한다. 예컨대, 시집살이를 어렵게 한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어렵게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자기는 나중에 지금 시어머니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란 머리보다 몸으로 살게 되어 있고 배우는 일도 머리보다 몸이 빠른지라 막상 시어머니가 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배우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일진대,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우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고 했다.
왕필(王弼)은 이 말을 풀이하면서, 도가 자연을 본받기 때문에 하늘이 도를 본받고 하늘이 도를 본받기 때문에 땅이 하늘을 본받고 땅이 하늘을 본받기 때문에 사람이 땅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훌륭한 학생이기 때문에 남의 스승이 된다는 얘기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없어서 억지로 자연(自然·절로 그러함)이라 부르는 ‘그것’ 한테는 스승이 없다. 더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동시대에 참 스승으로 모실 분을 만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복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 인연이 닿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학생이 준비되어 있으면 선생이 나타난다는 속담을 믿고 평소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두루 갖추고자 애쓸 필요는 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사람이 최고의 스승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그 자연이 바로 최고, 최후의 스승임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얘기다.
사람이 사람한테서 배우면 주로 말이나 글을 쓰기 때문에 쉽기는 하나 위험하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란 본디 태생이 모자라고 어긋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말없는 가르침을 베푼다고 했다.
그분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지못해서 하셨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예수가 생전에 글을 단 한 줄도 적어서 남기지 않으신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한테는 남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무심(無心)으로 남을 가르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한테서 배우면 잘못 배울 염려가 없다. 자연은 우선 사람을 가르치겠다는 뜻이 없다. 오로지 제 성(性)을 좇아 존재할 따름이고 그래서 가장 높은 스승이 될 수 있다.
높은 산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본다. 개울이 커서 강이 되고 강은 마침내 바다가 된다. 개울 강 바다가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요,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다. 강이 개울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제가 저한테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강이 개울을 배척한다면 제가 저를 배척하는 것이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연세계에서는 만고에 그런 일이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一部)이면서 자연이다. 자연이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지 못하니 그 삶이 어찌 고단하고 힘겹지 않으랴? 자연은 억지를 모른다. 모두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이루어지니 따로 힘쓸 데가 없다. 억지로 흐르는 물 못 보았고 기를 쓰고 피는 꽃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을 스승으로 보셨던 노자는 말하기를, 나의 가르침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하기 쉽다고 했다. 빈 말이 아니다. 대나무가 너구리처럼 살려면 힘들겠지만 대나무가 대나무로 사는데 무슨 힘이 들겠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는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2. 과연, 종말은 종말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동해안 죽변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인데, 한 중학생 녀석이 심각한 얼굴로 찾아왔다. 두툼한 책을 들고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라는 책인데 고도 벤이라는 일본인이 쓴 것이었다. 그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고 있었으므로 나를 찾아 온 중학생 녀석의 얼굴이 왜 그토록 심각한지 짐작이 갔다.
“왜 그래? 그 책을 읽어보니 살 생각이 안 나니?”
“앞으로 18년만 있으면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데요, 목사님.”
“그래서?”
“공부는 해서 뭘 해요? 세상이 끝장인데.”
“언제 끝장난다던?”
“1998년이래요.”
“그럼 몇 년 남은 거냐?”
“18년이요.”
“이놈!”
이럴 때는 큰소리를 치는 게 상책이라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이 있나? 넌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이야! 안 그래?”
“...”
“18년 뒤까지 살아 있을 자신도 없는 놈이 왜 그때 걱정을 지금부터 하는 거냐? 건방진 놈! 하나님이 널 그때까지 살려주시마고 무슨 약속이라도 하셨어?”
녀석은 내가 고함을 지르자 어마지두에 <노스트라다무스>를 옆구리에 끼고 벌떡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일어서? 내 말이 아직 안 끝났으니 앉아.”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하고 대충 아래와 같은 ‘설’을 풀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미래의 그날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말고 오늘밤 닥칠지 모르는 그 순간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생각해봐라. 우리 목숨은 언제 어떻게 끝나버릴지 모르는 것 아니냐? 그러니 기독교인은 언제든지 깨어 있어야 해. ‘깨어 있다’는 말은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이 주신)일에 충실하는 것을 뜻한다. 20년 뒤에 끝장이 나든 20억년 뒤에 끝장이 나든 그건 지금 네가 걱정하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나도 그 책을 읽어봤지만, 그러니까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는 말은 없더라. 그냥 재미난 만화책 하나 읽었다 셈치고 잊어 버려, 임마! 그딴 책은 그렇게 읽어치우는 거야.”
녀석이 그날 내 설교에 승복을 했는지 여부는 기억에 없는데 십여 년 세월이 흐르고, 요즘 다시 노스트라다무스가 나와서 설레발을 치며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가끔 서울에 가보면, 전철이나 버스 정거장에서 최후의 심판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최근 들어서 부쩍 심해진 듯하다. ‘휴거’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종말론을 강해하는 설교가들이 마치 제 세상 만난 듯 맹활약이다. 과연, 종말은 종말이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언어가 아닌 삶으로서의 말씀)은 까마득한 변두리로 밀려나 어둠 속으로 떨고 있는 데 시답잖은 잔소리들이 시끄럽게 고막을 울리며 미필적 고의로 사람을 속이고 있으니 이야말로 마지막 날들의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지난번 서울시내 어느 교회에서는 이아무개 목사가 와서 1992년에 휴거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장장 3시간 넘게 합리적 성서적 증거를 대며 풀었는데, 마침 그 교회는 현재 수억의 예산을 들여 새 예배당을 신축하는 중이었다. 계획대로 건축이 진행된다면 1992년 가을쯤 완공이 될 터인데, 그토록 애써 세운 예배당에서 제대로 예배나 드려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해가 휴거의 해라니까 말이다. 더욱 모르겠는 것은 모두 들려 올림 받을 줄 알면서 불바다로 될 이 지상에 거창한 예배당을 세우는 까닭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그 얘기를 듣다가, “모드 들림 받는다면서 예배당은 뭐하러 세워?” 했더니 “모르는 소리”란다. 세상에 예배당 짓다가 들려 올림을 받으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맙소사! 병도 이정도로 깊으면 되돌릴 가망이 없지 싶다. 역시 이야기를 듣던 한 사람이, “계속 예배당을 세우라고 해”한다. 그러고는 이어서 하는 말, “다 세운 다음 교인들이 몽땅 올라가고 나면 우리가 들어가서 살 테니까.”
작고하신 장공 김재준 목사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시절이 수상하면 참서(讖書)가 나도는 법이지.”
수레가 멈추면 수레를 때릴 것인가? 아니면 수레 끄는 말을 때릴 것인가? 엉터리 종말론이 활개치는 길목에 서서 헐떡이는 기독교의 혈관에 무슨 주사를 놓아야 할까, 생각해본다.
23. ‘이랴’와 ‘워’
사람이 소를 부리는 데는 적어도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이랴’와 ‘워’가 그것이다.
‘이랴’는 앞으로 나가라는 말이고 ‘워’는 멈추라는 말이다. 소가 사람과 함께 일을 해내려면 최소한 이 두 마디 신호는 알아 들어야 한다.
요즘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도시고 농촌이고 할 것 없이 이런 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으니 ‘이랴’니 ‘워’니 하는 말 자체가 사전 속 고어로나 남게 될 운명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소를 부릴 적에 ‘이랴’뿐 아니라 ‘워’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소를 부림에 일을 “하라”는 뜻인 ‘이랴’ 뿐 아니라 “그만두라”는 뜻인 ‘워’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사람이 하는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또, 적용되어야만 한다. ‘워’없이는 ‘이랴’가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
컴퓨터로 대표되는 최첨단 과학기계를 부리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제어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모든 기계가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나아가 인간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달고 있다 해도 구르는 바퀴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장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경우에 그 자동차는 아까운 사람 목숨만 잡아먹고 말 것이다.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 몸을 기계에 견주는 것이 좀 엉뚱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육신도 ‘워’없이 ‘이랴’만 가지고는 부려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걸 무시하니까 덜컥 병들어 눕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드디어 예측한 대로(?) 자리에 누웠다. 한 번 눕기로 하니까 내 몸은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다른 데보다 특히 목구멍과 기관지가 있는 앞가슴의 반발이 심했다. 눕기 직전에 내 생각에도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대를 부리긴 했다. 끊임없는 기침이 쏟아지면서 기관지 부근이 저려 왔다. 거기에다 오한이 나고 손과 발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사시나무 떨 듯 떨어 댔다. 마침내 나의 몸은 나의 명령을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워’를 선언해버렸다. 그러고는 뻗어 버린 것이다. 속수무책, 겨우 뒷수습에 나선 나는 몇 군데 약속해놓았던 ‘일’의 중단을 선언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구들장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한 이틀, 문자 그대로 완전휴식이 들어가 말하자면 정신없이 앓았다. 그러고 나니 겨우 열이 가라앉으며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화가 이철수가 아침 재를 넘어 와서 보신탕을 나누었고 육신의 반란도 이쯤해서 끝나려는가 싶어, 눈치 보듯 지금 이 글을 쓴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적에 이렛날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 날은 옹글게 쉬라고 명령하신 뜻을 이제 조금 알겠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聖)이라는 형용어가 붙은 것이 이렛날 곧 ‘쉬는 날’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메시지를 인간에게 암시해주고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 가운데 스스로 쉴 줄 모르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동물 밖에 없으리라. 왜 인간은 쉬지를 않는가? 누가 쉬지 못하게 강제하는가? 인간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인간을 쉴 줄 모르는 동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또는 쉴 수 없도록 남에게 일을 강요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날마다 쉬지 않고 잡아 먹는다.
그러기에 병들어 눕는 것이 어쩌면 하늘이 마련한 최후의 은총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다른 치유책이 없을 때 훌륭한 의사는 독약을 쓴다. 맹렬한 산불을 잡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 맞불을 놓아 불을 삼키게 하는 것이듯이, 생명의 원리는 어쩔 수 없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인간에게 ‘질병’을 안겨주는 것이다. 과연 “병이 곧 치료”라는 말은 옳은 말이다.
안식일은 안식일 교도들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 남기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뜻을 절실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친구인 북산(北山)이 고급 등산화를 사서 보내 왔다. 나에게 그것은 그냥 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아니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살펴보라는 간절한 메시지였다. 소도 사람도 ‘이랴’만으로는 부릴 수가 없는 법.
여기까지 쓰고 났는데 갑자기 우리 집 강아지 ‘꿈’이 어두워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짖어 댄다.
워 워 워...
23. 초등학교 교사와 대학교수
대학교 입시부정 사건이 온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선생과 학생과 학부모가 삼위일체로 이를테면 비열한 속임수를 자행하였다니 놀랄 만도 하다. 그러나 ‘참교육’을 하겠다는 교사들이 쫓겨나고 이런저런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참작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뒤늦게 발각이 된 셈인데 역시 이번에도 걸려든 자들만 억울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교육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길러 가지고는 나라가 스스로 골병들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뜻있는 이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는지 난감한 현실 앞에 절망감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뭔가 구체적으로 각자의 현장에서 이 나라 교육을 바로 잡기 위한 일에 착수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우리가 당장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제안하고자 한다.
무엇인고 하니, 대학교수보다는 중고등학교 교사를, 중고등학교 교사보다는 초등학교 교사를 명실상부로 존대하는 풍토를 조성하자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이 어떤 전문가로 만드는 것보다 근본적이고 시급한 일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굉장한 전문가라 해도 인간이 돼먹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이 사회를 건설하기보다 파괴하는 데 소용될 것은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고 또 불행하게도 우리가 현실에서 뼈저리게 경험하는 바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는데 한 나라의 장래를 짐작하려면 그 나라의 전문 교육기관보다 초등학교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적당한 속임수와 돈만 있으면 입신양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학생한테 전문지식을 넣어준다는 것은 강도질할 마음을 잔뜩 품고 있는 놈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초등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학생,학부모,교사 삼위일체가 되어 힘을 쏟아야 하지만 특히 교사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시방 이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교사가 대학교 교수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학대받고 있지 않은가? 봉급액수도 그렇고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 안타깝지만 장본인들의 생각도 대개 그러하다. 어불성설이다. ‘대학교수’쯤 되면 어딜 가도 어깨를 펼 만한데 ‘초등학교 선생’한테는 ‘님’자도 잘 붙지 않는다. 이런 엉터리없는 노릇이 어디 있는가?
초등학교 교사의 위상을 높이고 따라서 그 자질까지 높이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봉급액수를 중고등학교나 대학보다 높이면 된다. 그러면 능력과 뜻있는 이들이 대학교수가 되려고 애쓰는 대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애쓸 것이고 따라서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자연 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라는게 그리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이럴 때에는 대단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을 대학교수의 봉급보다 더 많이 올릴 수 없다면 최소한 같은 수준으로라도 조정하자.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게 정 ‘예산’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대학교수의 봉급을 하향조정 하든지, 그것도 어려우면 초등학교 교사에게 나라에서 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을 주기로 하면 된다.
나라를 살리자는데 못할 일이 무엇인가? 그건 혁명이고, 그래서 안 된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그래도 지구는 돌 듯이, 초등학교 교사가 대학교수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다.
23. 시방은 아무쪼록
소나무가 소나무를 떠나 나무로 돌아가면
곁에 있는 참나무와 한 몸이 된다.
나무가 나무를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면
아래에 있는 바위와 한 몸이 된다.
내가 나를 떠나 사람으로 돌아가면
멀리 있는 너와 한 몸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면
걸터앉은 바위와 한 몸이 된다.
아아, 한 물건으로
한 물건으로 돌아만 가면
사방천지 탁 트여 거칠 것이 없겠구나
어떤 이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처음부터 한 물건도 없다 했지만
지금 내 형편으로는 너무 먼 얘기다
시방은 아무쪼록 나를 떠나 사람으로 돌아가기
사람도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기
마침내 나를 떠나 나없는 나로 돌아가기!
23. 간소하게 먹을 줄 알아야.
흥청대고 마신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오늘 소비를 권장하다 못해 강요하는 시대의 도시인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참말이지 불쌍하고 안됐다.
도대체 왜 음식 쓰레기가 나오는가? 먹을 만큼만 만들고 만든 음식은 다 먹고, 그 일이 왜 안 되는가? 요리과정에서 버릴 수 밖에 없는 것들, 예컨대 조개껍질이나 배추떡잎 따위는 따로 모아 흙에 묻으면 대지가 기름지게 된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짓만 안 해도 단박에 사람이 달라진다. 인생관이 바뀌고 사람이 바뀐다. 21세기를 대비하여 세계화 시대에, 어쩌고저쩌고 나발 불기 전에 먼저 네 집 밥상부터 깨끗이 하거라. 밥 하나 제대로 먹을 줄 모르는 주제에 민족은 뭐고 통일은 또 뭐냐? 빌어먹을 '무한경쟁시대'에 낙오자 돼도 썩 좋은 일이니 모름지기 짬밥통을 살찌우지는 말 것이다.
음식은 먹고 남아 쓰레기로 넘쳐 흐르는데 마음은 이 걱정 저 걱정으로 초라하다. 아이들 사교육비가 큰 부담이 된다면서도 유치원 나이에 벌써 학원순방이다. 국민적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해도 쓸데없고 그래서 오히려 인생을 망가뜨리는 온갖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 느느니 스트레스요, 그 놈의 스트레스 풀러 다니느라고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돌아가자. 시작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음식 안 남기고 다 먹기,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먹을 만큼만 만들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지금 있는 곳에서 당장에 할 수 있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게 왜 안 된단 말인가? 안 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목포 시내에 '유달콩물'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그 집 벽에 이런 글이 붙어 있다. "간이 맞으면 반찬은 없어도 됩니다." 맞는 얘기다. 그 집에서는 반찬을 따로 내주지 않는다. 손님이 먹고 싶은 반찬을 접시에 담아 먹게 돼 있다. 그 대신 남기면 안 된다.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가 없으니 밥상은 늘 상쾌하고 설거지 하기 좋고 돈 적게 들고 온통 좋은 것 뿐인데 왜 다른 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아이들한테 뺑뺑이 안 시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아니, 그 반대다. 유치원 때부터 그렇게 잘못된 경쟁 이데올로기에 속아서 학원순방을 시키면 그 아이 장래가 절대로 건강한 인생일 수 없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날마다 밥상에 음식 쓰레기나 만들고 어린 자녀들을 이 학원 저 학원 순방시키는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여. 그대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 그대는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다. 쥐뿔도 믿지 않는다. 그대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있다.
23.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1. 어느 날 문득 수염 자르기가 귀찮고 덧없게 느껴져 내버려두었더니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제법 텁수룩해졌다.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묻기를, “수염은 왜 기르오?” 하는데, 묻는 사람이야 한 번 묻고 마는 거지만 대답하는 쪽은 번번이 대꾸하기가 수염 자르기 못잖게 귀찮고 자못 번거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으레 하는 나의 대답인즉슨,
“기른 적 없소,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이오.”
상대방이 남자 어른일 때에는 한마디 덧붙인다.
“당신도 내버려둬 보시오, 그럼 이렇게 될 테니.”
그러면 대개 웃고 만다.
말인즉 옳은 말이지, 일부러 기른다는 생각 없이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예외 없이, “왜 수염을 그냥 두오?” 하고 묻지 않고 “왜 수염을 기르오?”하고 묻는다.
이십년 넘게 정성껏 잘라오던 수염이다. 그만큼 빈틈없이 잘라댔으면 수염이란 놈 스스로 자르는 쪽 성의를 생각해서 나오기를 자제하든지 아니면 나가봤자 또 잘릴 것을 나가 뭐 하겠느냐 해서 아예 포기하든지 할 일이건만 눈이 멀었는지 쓸개가 빠졌는지 줄창 나오고 또 나온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르는 쪽이 손을 든 것이다. 잘라도 잘라도 죽을 때까지 나오겠다면 무슨 수로 막을 건가? 그랬던 건데 사람들은 왜 수염을 기르느냔다.
아하, 그러고 보니 자르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곧 기르는 거로구나? 생명을 기른다는 게 그냥 내버려두는 거로구나?
그렇다면 반드시 수염만 그럴 것인가? 오늘 저 숱한 ‘학교’들은 아이를 기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여린 싹을 자르고 있는 걸까? 딴에는 잘한답시고! 그것도 세상의 존경과 월사금까지 받아가면서...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은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일 아닌가? 율곡의 말씀마따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배우지를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는”일이거늘.
그러니 마땅히 가르칠 일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없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가 없으므로.
따라서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있다. 아니, 오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으니 어떻게 하면 가르친다면서 배우고자 하는 이의 싹을 잘라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을 것이냐가 그것이다. 아니, 아니,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엄청난 죄를 짓는 자들이 활개 치며 교육현장을 누비고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냐? 또는 그런 자들이 높은 자리에서 많은 돈을 받아 먹으며 오히려 거들먹거리고 있는 풍토를 갈아엎을 것이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혁명’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는데 ‘혁’자만 나와도 질겁을 하는자들이 있어서 써먹기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는 현실을 아니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천만의 말씀! 그냥 몇가지 교육제도나 법조항을 손봐서 될 일이 결코 아니다.
돈이면 다 좋고 다 된다는 생각을 뼛속깊이 새겨주는 이 환장할 썩어빠진 자본주의 타락한 세계관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발맞추어 살아갈 ‘우등생’을 생산해내는 교육이라면 백번 천 번 뒤집어엎어 마땅치 않겠는가?
그런데 그 혁명이라는 게 ‘악질관리’ 몇 명쯤 모가지 자르고 몇 가지 제도를 바꾸는 식으로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혁명은 제 모가지 내놓고 어떤 일을 음모하는 자들의 모임에서 싹트게 마련이다. 오늘 이 땅에 교육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엄청난 일’을 꿈꾸는 자들의 은밀한 모임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일이란,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인들이 누구를 어떻게 때려잡고 어디를 틀어막고 어디를 죌 것인가 하고 음모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게 무엇인지, 오늘 참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교육의 근본목적과 그 방법을 찾아보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통해오던 논리나 관습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전혀 새로운 ‘길’을 찾아 그 길을 현장에서 닦아나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로 돌아오고 마는구나!
해묵은 나무껍질은 갈라져 드디어 떨어지고 만다. 그 까닭은 보이지 않는 속에서 줄기차게 살아 숨쉬며 자라고 또 자라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생명현상으로 보는 습관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갈 필요가 있다.
3. 수염 하나에서 교육의 원리를 뽑아내본다.
내버려둔 지 1년만에 턱수염은 길이가 8센티미터쯤 되는데 콧수염은 고작 1센티미터 남짓이다. 콧수염이라고 해서 일부러 가위를 대거나 칼을 댄 일이 결코 없건만, 제가 스스로 알아서 턱수염처럼 마음껏 자라지 않고 적당한(음식 먹기에)선에서 성장을 멈춘 모양이다. 그것 참 신통한 일이다. 콧수염이 턱수염처럼 마냥 길게 자란다면 밥 먹고 물 마시기가 여간 거북스럽지 않을 터인데 적당한 선에서 성장을 멈춤으로써 조금도 성가시지 않으니 참으로 자연은 신통하다.
그렇다. 바로 이 ‘자연’을 배우고 가르치는 거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자연은 자연으로 어울리고 함께 산다. 큰 놈 작은 놈이 따로 있지만 차별은 없다. 생쥐가 코끼리를 부러워 않고 황소가 지렁이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저마다 제 길을 갈 뿐이나 전체로는 하나를 이루어 오늘도 ‘대동세상’을 만들어간다.
“사람은 땅을 배우고 땅은 하늘을 배우고 하늘은 길[道]을 배우고 길은 스스로 그러함
[自然]을 배운다“(노자)고 했다.
여기 말하는 ‘자연’을 창 밖의 들과 산과 나무 따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늙은이’(老子)가 말하는 자연이란 하나님이요 부처님이요 이(理)요 기(氣)요 모든 있음[有]이며 또한 아무것도 없음(無)이다. 결코 손에 잡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마냥 막연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리 속에 있으면서 또한 우리를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열매와 나무가 서로 상대방을 품고 있듯이.
4. 학급에서 당장 ‘자연’을 배우고(배움은 곧 본받음이다) 그것을 실천해낼 수 있는 길 하나를 생각해본다.
‘우등상’을 없애는 거다. 아니 아예 상이란 놈을 없애는 거다. 주던 것을 갑자기 안주면난리가 날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작은 ‘난리’가 거대한 ‘혁명’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꼭 줘야만 한다면 공부 잘하고(정확하게 말하면 시험점수가 높고) 말 잘 듣는 놈한테만 주지 말고 달음박질 잘하는 놈, 변소 청소 잘하는 놈, 유리창을 기막히게 잘 닦는 놈, 동무들을 잘 웃기는 놈... 에게 ‘우등상’을 주는 거다. 단, 제 길을 걸으면서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놈(아무리 산수능력이 뛰어나다 해도)한테는 엄하게 벌을 내릴 것.
5. 배움(學)과 물음(問)이 이음씨 없이 맺어진 것이 학문이다. 문학이란 하지 않고 학문이라 함은 물어서 배우는 게 아니라 배워서 묻는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 학문이란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제자가 물어야 할 바를 제대로 묻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는 자는 결코 그 틀을 찢고 나올 수 없다.
이른바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어떤 틀에다가 우겨넣는 범죄행위는 결코 교육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끝없이 ‘자유’를 바라고 나아가는 자세에서 비로소 사람이 사람인 까닭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자연은 일란쌍생아다. 한쪽이 깨어지면 한쪽이 죽는다. 사람을 살리는 교육을 창조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 잡는 교육 아닌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
가을 하늘은 저리도 높푸른데 이 땅의 아이들만 터무니없이 풀죽어 무거운 책가방 아래 짓눌려 있을 까닭이 없잖은가 말이다.
<아무일 안하고 잘산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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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주님
관옥의 기도일기
[2010. 4. 27 5. 14]
[4. 27. 밤]
저 내일 미국에 갑니다.
시카고로 갔다가 센트 루이스를 경유하여 LA를 다녀올 예정이에요.
주님, 이번 여정이 주님과 저 사이의 은밀한 밀월여행이었으면 합니다.
그것만 잘 되면 다른 모든 일정들도 저절로 잘 될 테니까요.
[4. 28. 새벽]
주님, 저 지금 인천에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로 열 시간째 공중에 떠있습니다!
이 무거운 물건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공중에 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두 시간 넘게 떠 있다가 땅으로 내려간답니다.
땅에서 떨어뜨려 허공에 띄우는 힘과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말하자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얘긴데,
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또 무슨 힘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처드 로어를 시켜 이런 글을 읽게 하시는군요.
"심연(abyss)이면서 바닥(ground)이신 하느님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벌거숭이 지금' 안에서,
부분이자 전체인 참 나를 충실하게 살 수 없다."
지구에서 비행기를 잠시 떨어뜨려 허공에 띄우는 힘도,
그 비행기를 다시 아래로 끌어내려 땅과 하나 되게 하는 힘도,
모두가 땅이면서 하늘이신 당신한테서 나오는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주님, 제가 과연 당신 품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이며,
어디로 가는 건 관두고,
제가 과연 당신을 떠날 수 있기나 한 걸까요?
그러니 안심입니다.
지상의 모든 부력(浮力)이 중력(重力)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
이보다 더한 안심의 바탕이 어디 있겠습니까?
[4. 28. 밤]
4월 28일 수요일 오전 11시 5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열두 시간을 날아 4월 28일 수요일 오전 10시 10분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같은 날 11시 50분에서 10시 10분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열두 시간이 걸린 거예요.
1시간 40분을 거꾸로 거스르는 데 열두 시간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 기계시간으로는 동시(同時)란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수평적 시간, 땅의 시간, 크로노스로는 동시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동시에 무엇을 한다거나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려면,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수직적 시간, 하늘의 시간, 카이로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시공을 벗어난 당신이 시공에 갇힌 저를 찾아와 만나주시는 일은
때와 곳에 아무 연관이 없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지요!
아아, 주님, 제 몸처럼,
언제 어디서나 빈틈없이 지금 여기에 착실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붙잡아주십시오.
[4. 29. 아침]
주님, 날이 밝아옵니다.
전 지금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일리노이 주 비숍에게 마련해준 집 이층 방에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신록의 가지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이름 모를 새들이 춤추는 나무에 앉아 꽁지를 까불고 있네요.
강화도 산골 코흘리개 소년을 키우고 이끌어
이곳 아메리카 대륙의 교회들을 섬기는 목사들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히신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연출이요 작품임을 기억합니다!
이왕 저 자리에 앉히셨으니 법과 정의보다 긍휼과 자비로,
단단하고 차가운 명령보다 부드럽고 따스한 지혜로,
교리와 장정과 회의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소서.
[4. 29. 낮]
오, 주님.
당신은 어둠에 숨어
모든 것에서 자기를 보고 자기를 사랑하는 빛이십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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