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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의추억

눈빛포스 2009. 7. 17. 13:02
부엌에서 설탕봉지가 자리를 잡은 것은 언제쯤일까?

요즘에야 이러니저러니 해서 기피첨가물같이 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설탕은 구경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대신 사카린이거나 둘씬을 원료로 당원이나 뉴슈가가 단맛을 내주었다.

당원은 각성냥갑처럼 생기고 비닐봉지 안에 작은 알들이 50개쯤이나 들어있었고

한 갑에 10원정도 뉴슈가는 좀 더 후에 분말로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설탕보다 몇 백배나 높은 단 맛을 내는 사카린은 인공첨가물 출신으로

발암물질이라거나 몸에 그다지 좋을 게 없다지만 그 시절 당원이나 뉴슈가는 주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을 내는 첨가물이었고 심지어는 현대인들이 즐겨 마시는 피로회복제같이

선호하고 즐겨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카린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하나.

60년대 중반, 당시 국내굴지의 재벌기업 삼성이 건설자재로 위장 일본에서 사카린을

대량 수입하였고 통관도중 적발되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크게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었는데.

결국 국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오물을 뿌리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 하는 일갈과 함께 당시 정일권 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인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는.

그리고 그 휴우증으로 장군의 아들은 금배지를 반납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칠월 폭염에 콩밭 매는 어머니를 위해 두레박으로 아래 찬물을 길어 올려

당원을 숟가락으로 으깨어 물에 타고 역시 당원물을 치고 감자를 삶아

콩밭으로 가곤 했다.

차가운 물이 담긴 주전자는 더위에 땀을 내듯이 물방울이 배어나고

어머니는 그늘도 없는 밭고랑에 앉아 그 당원물을 달게도 잡수셨다.

지금의 기준으로 한다면 영양가도 오히려 몸에 해로울지도 모른다고 하겠지만

그 당원도 아껴서 먹던 몰래 숨겨 두어야했던 귀한 것이기도 했다.



물이나 막걸리도 담아 나르던 용기는 이곳저곳 멍자국도 있던 양은주전자가 대부분이었으니

쑥을 뜯어 주둥이를 틀어막기도 했지만 밭에 도착하고 보면 반쯤은 흘러내리고

들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아깝기도 한 당원물은

길바닥으로 배어들었고 터덜터덜 다시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지금이야 페트병류가 흔하고도 쌔기도 했지만 그 당시야 구경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 요즘 마구 버려지는 페트병들을 보면 저 가볍고 휴대도 간편한

것들이 있었으면 그 시절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절 개떡을 찌거나 늙은 호박을 삶거나 술을 거르고 난 텁텁하고 거친

지게미를 먹어야 할 때도 사카린이나 당원이나 뉴슈가는 그 텁텁함을 매끄럽게

맛을 내주는 귀한 것이기도 했고 늘 부뚜막 한견을 자랑스럽게 차지하고 있던

조미료 '미원'만큼은 아니지만

부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 시절 애나 어른이나 모두 단 맛에 주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1원 동전 하나만 생겨도 점방으로 달려가 '누가'이거나 '제리'이거나

와 바꿨고 오원이면 둥글고 검누릿한 막대사탕을 사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아이들 선물의 주류는 사탕류였다.

지금이야 이가 썩느니 그리고 사탕보다 더 자극적이고 강한 단맛들이 배인

주전부리들이 많기도 하지만 애나 어른이나 최고의 기호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월이 지나면서 하늘색 파란 사각 통에 '께끼'를 파는 젊은이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혀가 얼음에 말리면서 느껴지는 시원함과 달달한 맛은 그 여름에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상대가 없었고 지난 번 몰래 마늘 다섯 뿌리를 떼어다주고 장딴지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지만 그 맛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께끼는 오원, 팥이 들어있던 하드는 십 원이나 이었으며

그리고 겉보리이거나 마늘이거나 고무신 빈병도 그 께끼와 바꿔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께끼가 주던 달달한 맛 역시 사카린이 내는 맛이었다.



그리고 옥수수가 익어가면서 그 옥수숫대에 단맛이 배어들고 다발로 묶어 다니면서

입술이 베어지기도 하면서 껍질을 벗겨내고 단물을 빨아대곤 하였다.

그래도 형편이 나은 집이면 밭가로 단수수를 심기도 했다.

단 수수는 수수와 똑 같은 모습이나 수수 알을 얻을 수는 없었고 단지 주전부리용이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서 산밭에 목화 꽃이 피고 목화다래가 쑥송편같이 익어 가면

껍질을 벗겨 후에 솜꽃으로 피기도 할 과육을 씹어 달근한 맛을 즐기기도 했다.

가을이면 온 산으로 들로 머루나 다래, 보리수를 훑으며 단 맛을 찾아다녀야했다.



그리고 제사 때나 돼야 먹을 수 있던 식혜이거나 설이 가까워지면 엿을 고면서

단 맛을 보기도 했는데,

이래저래 단 맛을 멀리할수록 좋기도 하다는데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장마가 지나면 태양은 뜨거워지고 하현달처럼 기운 놋수저로 하지감자 껍질을 벗겨내고

무쇠 솥에 삶았다. 그 시절 사내 아이라도 그 정도는 기본으로 해내던 시절이엇다.

투실투실 먹음직한 찐감자를 대바구니에 담고 시원하고 달달한 당원물 든 주전자와 함께 그 뙤약볕에 콩밭 매던

어머니에게로 가곤 했다.

그 시절 숱한 개구리며 고추잠자리들이 앞장서기도, 뜨거운 태양과 짙푸른 대지로 난

들길을 가던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소년의 모습이 달근한 맛의 추억처럼 사무치게 그리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