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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무안박씨 종중

무안박씨당진공종중 시제

눈빛포스 2013. 10. 6. 19:47

 

중서 복락원(仲瑞 福樂院)/충남 논산시 상월면 대촌리 산24-6번지에 위치

 

 

 

 

 

중서(仲瑞) 박중구(朴重龜) (1961~1715)

1761년에 태어나셔서 1715년에 돌아가셨으니 이세상에 54년을 사셨다.

당진현감을 지내셔서 박중구할아버지를 중시조로 당진공 종중이라 명명한다.

당진공종중의 가족 공원묘지의 이름은 박중구 할아버지의 아호(중서 仲瑞)를 따서

중서의 후손들이 영생복락을 누리라는 뜻에서 중서 복락원 (仲瑞 福樂院)이라고 명명했다.

 

 

 

 

 

 

 

해마다 개천절날 모이는 시제

 

 

 

무안박씨 시조이신 박진승(고려시대 국학전주) *국학전주는 현 국립서울대총장급

 

 

박두성.박순철.박흥수.박종길.박석무.박한규등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신라 경명왕의 아들 완산대군 박언화의 5세손이다. 그는 고려 초 나라에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정착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무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박진승의 아들 박 섬은 고려 현종 때 공신이며 명신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증손으로 당대에 학문이 뛰어났던 박승중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시독학사를 지냈다. 박 섬의 6세손 박문오는 정승에 올라 가세를 중흥시켰다. 박대근은 조선시대 인물로 임진왜란 때 적의 정세를 정찰한 공으로 서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왕명으로 도요토미의 사신을 만나 능(陵)을 범한 적을 색출케 하는 등의 공로로 첨지중추부사에 특진된다.
현감 박세렴의 아들 박의장은 문무를 겸비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우 박홍장은 대구부사로 황 신과 더불어 일본에 사신으로 가 갖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현신(賢臣)이었다.
현령 박인호의 아들 박 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숙종 때 시인으로 학명(學名)이 높았던 박창하(형조좌랑 박규의 아들)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박창하의 아들 박 징은 숙종 때 한성부 우윤을 지내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아우 박 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하여 예학(禮學)을 정립했다. 한글 점자(鮎字)의 창안자인 박두성(1888~1963)은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대 인물은 박수웅(대일화학공업 대표이사), 박종득(대한방직 부회장), 박광섭(현대산업 사장), 박병순(육군소장), 박순철(성균관대 교수), 박순함(철학박사, 외국어대교수), 박승재(국회의원, 한양대교수), 박윤식(우성건업사장), 박종길(국회의원), 박종문(동국대교수), 박철재(이학박사, 인하공대학장), 박현각(변호사), 박흥수(이학박사, 성균관대교수), 박희진(한국일보상임고문), 박화복(목포화공대표이사, 대종회회장), 박연록(대림장호텔 대표이사), 박석무(국회의원), 박영한(변호사), 박연철(변호사), 박창규(목포대학장), 박한규(전북대학장), 박의재(충남대교수), 박만상(하와이대교수), 박유광(경제기획원 차관보), 박철환(판사), 박병문(외과의원장), 박시철(화가), 박정재(용문학원 이사장, 한영대표 이사), 박찬구(언주중학교교장), 박병옥(한성프린트팩 대표이사), 박병록(서예가), 박재만(건양공업 대표이사), 박천재(전남도의회 부의장), 박종팔(권투선수), 박병윤(서울경제신문 편집국장), 박준규(부사단장), 박신일(신우주택건설 대표이사), 박종성(삼미상사 대표이사), 박영화(평화상사 사장), 박경대(대한조화상사사장), 박응락(신흥공업대표이사), 박윤서(통일상임감사, 세무사), 박재욱(국제계기 사장), 박종오(우양교역대표이사), 박재옥(동아생명 전무이사), 박상연(유니온여행사이사), 박상배(대전충일여고 교장) 씨 등이 있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집성촌은 전남 일원에 가장 많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전남 해남군 마산면 연구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일원,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전남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보룡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성산리, 충남 논산시 상월면 일원, 충남 당진군 당진읍 우두리,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57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78,817명이다. 서울 19,754명, 부산 2,816명, 대구 2,426명, 인천 4,504명, 광주 5,954명, 대전 2,103명, 울산 1,099명, 경기 16,358명, 강원 1,894명, 충북 1,428명, 충남 3,487명, 전북 1,548명, 전남 10,087명, 경북 3,756명, 경남 1,288명, 제주 315명이다. 광주,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무안박씨는

무안박씨(務安朴氏)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무안박씨의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경명왕의 8대군 중 여섯째인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5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무안박씨에서는 12개 분파가 생겨났다. 개성파(開城派), 장단파(長湍派), 무안·서울·노성파(務安서울魯城派), 양근·남해·완도·진도·적성파(楊根南海莞島珍島積城派), 음죽파(陰竹派), 영해·양주파(寧海楊州派), 공주파(公州派), 홍산파(鴻山派), 당진파(唐津派), 연기파(燕岐派), 당진영파(唐津?派), 당진정파(唐津楨派)가 그것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에 의하면 무안박씨의 총 인구는 2만4746가구에 7만88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박씨의 2.0%를 차지한다.

경북 영덕에 있는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의공 박의장의 넷째 아들 박선이 큰형 박유를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무안박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고려시대의 박승중(朴昇中)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박의장(朴義長), 박홍장(朴弘長), 박창하(朴昌夏), 박호(朴浩)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인물로는 한글 점자(點字)를 창안하여 맹인들의 세종으로 칭송받고 있는 박두성(朴斗星)이 있다.

대전 뿌리공원의 무안박씨 유래비.
무안박씨의 연혁과 인물


무안박씨의 중시조 박진승의 아들 박섬(朴暹)은 고려 현종 거란의 2차 침공 때 호종공신으로 좌복야에 올랐다.

그의 증손으로 당대에 학문이 뛰어났던 박승중은 문과에 급제한 뒤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서 상정관(詳定官)이 되어 예의(禮儀)를 정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로 김부식(金富軾)과 더불어 ‘예종실록’의 편수관이 되었다. 이자겸이 국정을 맡게 되자, 그에게 아부하여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자겸의 몰락으로 탄핵을 받고 울진에 유배되었으나, 공로가 참작되어 무안에 안거하였다.

박섬의 6세손 박문오는 정승에 올라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 박문정은 문과에 급제한 후 팔만대장경 창제에 기여하였다. 무안박씨는 박문오와 박문정 두 형제 때 가세가 크게 흥했다. 무안박씨의 각 분파 중에서 박문오의 다섯 아들과 아우인 문정으로부터 분파된 가문이 많다.

10세 풍정공 박의룡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4세 박임경은 성삼문의 사위로 성삼문이 거혈형에 처하자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현감 박세렴의 아들 박의장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50여 회 전투를 이끌었으며, 그의 아우 박홍장은 대구부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고, 숙종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박창하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한글점자 창안자인 송암 박두성.
무안박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한글 점자의 창안자인 박두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경기 강화 출신으로 서울맹아학교 전신인 제생원맹아부 교사에 취임한 뒤부터 맹인교육에 힘을 썼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 이 한글 점자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불린다. 또한 ‘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하여 맹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 후 박두성은 성경의 점자원판(點字原板)의 제작에도 착수하여 1941년에 신약성서를 완성하고, 1957년에 성경전서 점역(點譯)을 완성했다.

그 외 무안박씨의 인물로는 재계의 박수웅(전 대일화학공업 대표이사), 박종득(전 대한방직 부회장), 박광섭(전 현대산업 사장), 박화복(목포화공 대표이사) 등이 있다. 국회의원으로 박승재(한양대 교수,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 박석무, 박종길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박종문(동국대교수), 박철재(이학박사, 인하공대학장), 박한규(전북대학장), 박창규(목포대학장) 등이 있으며, 권투선수였던 박종팔씨도 무안박씨이다.